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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명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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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성읍 지명유래

읍내1구, 묘천2구, 읍내2구, 읍내3구, 읍내4구, 읍내5구, 읍내6구, 읍내7구, 학정1구, 학정2구, 교촌리, 죽동리, 신월1구, 신월2구, 월봉리, 구원1구, 구원2구, 서계리, 대평1구, 대평2구, 대평3구, 신리, 동산리, 장선1구, 장선2구, 신기1구, 신기2구, 신기3구, 묘천1구, 묘천2구의 지명유래
읍내1구 영운(英雲)마을
‘마을앞에 여울진 내(川)가 흐르고 있다’하여 여울(灘)과 내(川)를 합해‘여울내’로 부르다가, ‘여우내’로 변하여 불리우게 되었으며‘영운리(英雲里)’는 여우내가 변형하여 표기된 것이다. 즉, 여울+내 ⇨ 여울내 ⇨ 여우내 ⇨ 여운내 ⇨ 여운애 ⇨ 영운으로 변화했다. 영운(英雲)은 영운을 한자로 옮겨 쓴 것이다. 본래는 곡성군 도상면(谷城郡 道上面) 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 구역 변경시 읍내리(邑內里)에 병합, 읍내리로 칭하여 곡성읍(谷城邑)에 편입되었으며, 1962년 읍내리 1구에서 2구가 분리되었다.
읍내2구 영운(英雲)마을
‘마을앞에 여울진 내(川)가 흐르고 있다’하여 여울(灘)과 내(川)를 합해‘여울내’로 부르다가, ‘여우내’로 변하여 불리우게 되었으며‘영운리(英雲里)’는 여우내가 변형하여 표기된 것이다. 즉, 여울+내 ⇨ 여울내 ⇨ 여우내 ⇨ 여운내 ⇨ 여운애 ⇨ 영운으로 변화했다. 영운(英雲)은 영운을 한자로 옮겨 쓴 것이다. 본래는 곡성군 도상면(谷城郡 道上面) 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 구역 변경시 읍내리(邑內里)에 병합, 읍내리로 칭하여 곡성읍(谷城邑)에 편입되었으며, 1962년 읍내리 1구에서 2구가 분리되었다.
읍내3구 동편(東便)마을
고려말(高麗末)부터 군(郡)의 치소(治所)가 설치되면서 읍내리(邑內里)로 칭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마을안에 솔밭이 있다’하여 예전엔 ‘송전(松田) 또는 송정(松亭)’이라 불렀다 전한다. 또한 ‘객사(客舍)의 동쪽에 있는 마을이다’하여 ‘동편(東便) 또는 동정(東井)’이라고도 불렀다. 1962년 행정구역분구(行政區域分區) 이전까지는 읍내2리(邑內2里)였으나 1962년 읍내2리 (邑內2里)가 3,4리로 분리 됨에 따라 읍내3리(邑內3里)가 되었다.
읍내4구 동편(東便)마을
고려말(高麗末)부터 군(郡)의 치소(治所)가 설치되면서 읍내리(邑內里)로 칭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마을안에 솔밭이 있다’하여 예전엔 ‘송전(松田) 또는 송정(松亭)’이라 불렀다 전한다. 또한 ‘객사(客舍)의 동쪽에 있는 마을이다’하여 ‘동편(東便) 또는 동정(東井)’이라고도 불렀다. 1962년 행정구역분구(行政區域分區) 이전까지는 읍내2구(邑內2區)였으나 1962년 읍내2리 (邑內2里)가 3,4리로 분리 됨에 따라 읍내4리(邑內4里)가 되었다.
읍내5구 객사(客舍)마을
고려말(高麗末)부터 군(郡)의 치소(治所)가 설치되면서 읍내리(邑內里)로 칭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곡성현청(谷城縣廳)의‘객사(客舍)가 있었다’하여 조선조말(朝鮮朝末)부터 ‘객사(客舍) 마을’이라 불렀다. 1962년 행정리(行政里) 분구(分區)이전까지는 읍내3구(邑內3區)였으나 1962년 분구(分區)된 후 읍내5구(邑內5區)로 칭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읍내6구 서편(西便)마을
고려말(高麗末)부터 군(郡)의 치소(治所)가 설치되면서 읍내리(邑內里)로 칭하여 현재에 이 르고 있다. 마을이 곡성현청(谷城縣廳)의 객사(客舍) 서쪽에 있었다 하여 조선조말(朝鮮朝末) 부터 ‘서편(西便)마을’이라고 불렀다. 1962년 행정 분구(行政分區) 이전까지는 읍내4구(邑內4區)로 되었으나 분구(分區)후 읍내리 6구(邑內里6區)로 칭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읍내7구 서편(西便)마을
고려말(高麗末)부터 군(郡)의 치소(治所)가 설치되면서 읍내리(邑內里)로 칭하여 현재에 이 르고 있다. 마을이 곡성현청(谷城縣廳)의 객사(客舍) 서쪽에 있었다 하여 조선조말(朝鮮朝末) 부터 ‘서편(西便)마을’이라고 불렀다. 1962년 행정 분구(行政分區) 이전까지는 읍내4구(邑內4區)로 되었으나 분구(分區)후 읍내리 6구(邑內里6區)로 칭하였고, 또다시 6구와 분구되면서 읍내리7구(邑內里7區)가 되었다.
학정1구 학림동(鶴林洞)마을
본래(本來) 도상면(道上面) 지역으로 학림동(鶴林洞)이라 칭하여 왔다. 이같은 마을 명칭은 마을 뒷산인 삼인동(三人洞)에서 연유되었다고 전해온다. 즉, 숲이 우거진 삼인동(三人洞)은 ‘신선(神仙)이 노는 곳’으로 학(鶴)은 신선(神仙)을 상징(象徵)하고 수풀 림(林)은 신선(神仙)이 살고 있는 곳을 뜻한다 하여 붙여진 마을명이다. 현재의 학정리(鶴亭里)는 1914년 행정구역(行政區域) 변경(變更)에 의거 학림동(鶴林洞)과 율정리(栗亭里: 鶴亭里2區)를 폐합(廢合), 두 마을에서 학(鶴)자와 정(亭)자를 취해 개칭(改稱)한 것이다.
학정2구 율정(栗亭)마을
본래(本來) 도상면(道上面) 지역으로서 밤나무숲이 마을 앞과 뒤에 있어 큰 밤나무가 많다 하여 ‘밤정이(栗亭)’라 불려오다가 1914년 행정구역(行政區域) 변경(變更)으로 학림동(鶴林洞)과 폐합(廢合) 하여 학정리(鶴亭里)라 칭하고 현재에 이르렀다.
학정3구
교촌리 교촌(校村)마을
향교(鄕校)가 있는 마을이라 하여 ‘향교골(생교골)’또는 ‘교촌리(校村里)’라 칭했다. 교촌마을은 원래 마을에서 200m쯤 떨어진‘마을 뒤에 대나무밭 언덕이 있다’하여 ‘죽안(竹岸)’이라 부르는 마을과 분리되어 있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行政區域) 변경(變更)에 의거 이 2개 마을을 병합 (倂合) ‘교촌리’라 칭하고 현재에 이르고 있다. 한편, 향교(鄕校)가 있는 교촌마을을 학정리 (鶴亭里)와 죽동리(竹洞里)사이에 자리잡고 있다 하여 ‘샛골’이라고도 불렀다.
죽동리 방죽골(防竹골)마을
본래 도상면(道上面)에 속한 지역으로서 방죽이 있는 마을이라 하여 ‘방죽골’ 또는 방죽동 (防竹洞)으로 불리우다가 1914년 행정구역(行政區域) 변경으로 방죽동에서 ‘방’자를 빼고 죽동리(竹洞里)라 칭하고 곡성읍(谷城邑)에 편입, 현재에 이르고 있다.
신월1리 신흥(新興)마을
마을윗쪽 ‘웃터’(신월리 120번지 주변)에 조선시대 역마(驛馬)를 갖추어 중앙과 지방 사이에 공문서 전달과 관리의 왕래 및 운송(運送)에 따른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마련된 교통, 통신 기관인 지신역(知申驛)이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에 ‘역졸들이 많이 살았다’하여 ‘역골’ 또는 ‘역촌’이라고도 부르고 있다.
지신역이 폐지되고 200여년전 ‘웃터’에 살던 주민들이 농경지에 근접한 평지(平地)쪽으로 내려와 각각 새터를 마련하면서 마을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즉, 이 처럼 새터에 마을을 세우고, 마을이 부자마을 되라는 뜻에서 마을명을 신흥리(新興里), 마을이 달처럼 생겼으며 마을앞에 들녘(平野)이 있다 하여 월평리(月坪里), 새터를 개간해 마을이 들어섰다 하여 신평리(新坪里) 라 불러왔다. 세 마을의 거리는 각각 200m 안팎으로 매우 가깝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신흥리(新興里)와 월평리(月坪里)가 병합하여 신월리(新月里)로 개칭되었다. 그러나 1997년 월평리(月坪里)가 국가지원지방도 60호선이 4차선 도로로 확·포장되면서 다시 분리해 나갔지만 마을명은 옛 마을명으로 복원하지 않고 그대로 신월리로 사용하고 있다.
신월2리 월평(月坪)마을
마을윗쪽 ‘웃터’(신월리 120번지 주변)에 조선시대 역마(驛馬)를 갖추어 중앙과 지방 사이에 공문서 전달과 관리의 왕래 및 운송(運送)에 따른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마련된 교통, 통신 기관인 지신역(知申驛)이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에 ‘역졸들이 많이 살았다’하여 ‘역골’또는 ‘역촌’이라고도 부르고 있다.
지신역이 폐지되고 200여년전 ‘웃터’에 살던 주민들이 농경지에 근접한 평지(平地)쪽으로 내려와 각각 새터를 마련하면서 마을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즉, 이 처럼 새터에 마을을 세우고, 마을이 부자마을 되라는 뜻에서 마을명을 신흥리(新興里), 마을이 달처럼 생겼으며 마을앞에 들녘(平野)이 있다 하여 월평리(月坪里), 새터를 개간해 마을이 들어섰다 하여 신평리(新坪里) 라 불러왔다. 세 마을의 거리는 각각 200m 안팎으로 매우 가깝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신흥리(新興里)와 월평리(月坪里)가 병합하여 신월리(新月里)로 개칭되었다. 그러나 1997년 국가지원지방도 60호선이 4차선 도로로 확·포장되면서 다시 신흥리와 월평리가 분리되어 월평리(月坪里)로 복원 되었다.
월봉리 신평(新坪)마을
본 마을은 신평(新坪)마을과 저전(楮田)마을로 구분된다. 신평(新坪)은‘마을 앞 들이 새로이 개간되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저전(楮田)은 마을에 딱나무(楮)밭과 여울이 있어 ‘딱밭몰’ 또는 ‘저전리(楮田里)’라 불렀다.
본래 도상면 지역(道上面地域)으로서 1914년 행정구역(行政區域) 변경(變更)으로 신평리 (新坪里)와 저전리(楮田里) 및 당시 우곡면 묘천리(牛谷面 猫川里) 일부를 병합(倂合)해 월봉리 (月峰里)로 개칭(改稱) 현재에 이르고 있다.
구원1구 가운데동막(구 中)마을
본래 도상면(道上面) 지역으로서 이 지역에 고려 조선시대 역(驛)과 역(驛)사이에 공무(公務)를 보는 벼슬아치가 묵던 공공여관인 ‘자비원(慈悲院)’이 있었다 하여 구원(舊院)터 또는 구원촌 (舊院村)이라 하였다. 또한 웃동막(上東幕)과 아래동막(下東幕) 사이에 있는 동막(東幕)이라 하여 ‘가운뎃동막’(中東幕) 또는 ‘중터’라고도 부른다. 마을이 ‘맹골 또는 언동(彦洞)’, ‘동산(童山)’, ‘앞몰 또는 안몰, 내동’등으로 불리우는 세 촌락(村落)으로 형성되었으며, 1914년 행정구역(行政區域) 변경으로 구원리(舊院里)라 칭하며 현재에 이르고 있다. 마을명인 ‘동막(東幕)’은 마을 뒷편의 형제봉(兄弟峯)에서 유래된 것으로 산이 동쪽을 향하여 장막(帳幕)을 쳐 놓은듯한 형세다 하여 생긴 말이라 하며 한편으로는 지형이 형제장군(兄弟將軍)이 군막(軍幕)을 치고 동(東)쪽을 바라보고 있는 형국(形局)이라 하여 유래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마을의 서당(書堂)에서 오랜 세월동안 지역의 어린 학동(學童)들이 학문을 연마하는 터전으로써 ‘아이들(童)이 막 뛰어놀고 공부하는 곳’이란 친근한 의미를 두어 ‘동막골’이라 붙여진 명칭이라고도 전한다.
구원2구 아랫동막마을
읍과 가까이 아래쪽에 위치하고 있는 동막(東幕)이라 하여 ‘아랫동막(下東幕)’으로 불리어 왔으며 평지(平地)에 있다 하여 ‘평지벌’또는 평지촌(平地村), 큰마을과 사이가 떨어져 있다하여 ‘샛떰’, 방천(防川) 밑에 위치하고 있다 하여 ‘방천굴’또는 방천동(防川洞)이라 칭한 세 촌락(村落)으로 구성되었다. 이 지역에 고려 조선시대 역(驛)과 역(驛)사이에 공무(公務)를 보는 벼슬 아치가 묵던 공공여관인 ‘자비원(慈悲院)’이 있었다 하여 ‘구원(舊院)터’ 또는 ‘구원촌(舊院村)’이라 불러오다 1914년에 행정구역 변경으로 구원리(舊院里)라 개칭하고 현재에 이르렀다.
서계리 웃동막마을
곡성읍에서 제일 위쪽에 위치한 동막이라 하여 ‘웃동막(東幕)’이라 일컬어 왔다. 1914년 행정 구역(行政區域) 변경당시, ‘서(西)쪽에서 시내물(溪)이흘러내려온다’하여 ‘서계리(西溪里)’로 칭하였으며 현재에 이르고 있다.
대평1구 그심예마을
본래 예산면(曳山面) 지역으로서 큰 마을이라 하여 대리(大理)라고 하였으며 ‘그심예’, ‘그메’ 라고도 하였다. 이는 예산면(曳山面)의 예(曳)자 훈(訓)인 ‘끄을 예(曳)’에서 비롯 되었다. 현재의 대평리(大坪理)라는 마을명은 1914년 행정구역 변경에 의거, 대리(大理)와 마평리(馬 坪里)를 합하여 칭(稱)하게 된 것이다.
대평2구 그심예마을
본래 예산면(曳山面) 지역으로서 큰 마을이라 하여 대리(大理)라고 하였으며 ‘그심예’, ‘그메’ 라고도 하였다. 이는 예산면(曳山面)의 예(曳)자 훈(訓)인 ‘끄을 예(曳)’에서 비롯 되었다. 현재의 대평리(大坪理)라는 마을명은 1914년 행정구역 변경에 의거, 대리(大理)와 마평리 (馬坪里)를 합하여 칭(稱)하게 된 것이다. 대평리는 곡성평야 지대의 가장 남쪽 아래쪽에 자리잡고 있다하여 주민들 사이에서는 ‘아랫몰’ 이라고도 부른다.
대평3구 마평(馬坪)마을
마을이 ‘곡성평야(平野)의 중심’지대에 형성되어 있으며 지형이 ‘말형국(馬形局)’을 닮았다 하여 ‘마평리(馬坪里)’라 불러왔다. 그 후 1914년 행정구역 변경에 의거, 대리(大里)와 마평(馬坪)을 합하여 ‘대평리(大坪里)’이라 칭(稱)하고 현재에 이르고 있다.
신리 새몰마을
본래 예산면(曳山面)이 속한 마을로 ‘새로 생긴 마을’이라 하여 ‘새몰’ 또는 ‘신리(新里)’라 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行政區域) 변경으로 신리(新里)라 칭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동산리 동산쟁이마을
마을 뒤 산(山)이 배산임수지형(背山臨水地形)을 이루며 동(東)쪽을 향하고 있다 하여 ‘동산리 (東山里)’라 하였으며, 마을 뒷산에 동산정(東山亭)이란 정자가 있어 마을명으로 ‘동산정이’ 또는 ‘동산정’이라 부르기도 한다. 1914년에 예산면(曳山面)에 속해 있던 것을 곡성면(谷城面)으로 편입 현재에 이르고 있다.
장선1구 장선(長善)마을
섬진강(蟾津江)이 마을과 접(接)하면서 남북으로 길게(長) 흐르고 있어 마을 주민들도 유유히 흐르는 강줄기처럼 선량(善良)하게 산다는 의미로 착할 선(善)자를 택해 장선리(長善里)이라 명명했다 전한다. 본래는 예산면(曳山面)에 속해오다가 1914년 행정구역(行政區域) 개편(改編)으로 곡성읍(谷 城邑)에 편입되고 1962년에 행정구역변경(行政區域變更)으로 현 장선2구와 분리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마을의 가옥이 섬진강을 뒤로 두고 집단적으로 남쪽을 향하여 배치되어 있기 때 문에 ‘남촌(南村)마을’이라고도 부른다.
장선2구 장선(長善)마을
섬진강(蟾津江)이 마을과 접(接)하면서 남북으로 길게(長) 흐르고 있어 마을주민들도 유유히 흐르는 강줄기처럼 선량(善良)하게 산다는 의미로 착할 선(善)자를 택해 장선리(長善里)이라 명명했다 전한다. 본래는 예산면에 속해오다가 1914년 전북 남원시 금안면 석전리(石田里) 일부를 편입하였고 1962년에 행정구역(行政區域) 변경(變更)으로 현 장선1구(長善1區)와 분리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마을의 가옥이 섬진강을 뒤로 두고 집단적으로 서쪽을 향하여 배치되어 있기 때문에 ‘서촌 (西村)마을’이라고도 부른다.
신기1구 나룻물마을
강이 있어 나룻배를 이용한 나룻터가 있는 곳이다 하여 ‘진촌(津村)’또는 ‘나룻몰’이라고 하였으며 임진왜란(壬辰倭亂)때 싸움터였다 하여 ‘진(陣)터’라고도 불리웠다. 1914년 입면의 곡촌 일부와 전북 남원시 금안면 석전리(石田里) 일부를 병합 새로 잡은 터라 하여 ‘신기리(新基里)’라 칭하고 현재에 이르고 있다.
신기2구 새터마을
본래 예산면(曳山面) 지역으로 마을이 형성되면서 새로 잡은 터라 하여 ‘새터’라 불러오다가 1914년 행정구역(行政區域) 변경시 곡성읍(谷城邑)에 편입하여 ‘신기리(新基里)’라 칭하고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1962년에 신기리 3구(新基里3區)와 분리되었다.
신기3구 새터마을
본래 예산면(曳山面) 지역으로 마을이 형성되면서 새로 잡은 터라 하여 ‘새터’라 불러오다가 1914년 행정구역(行政區域) 변경시 곡성읍(谷城邑)에 편입하여 ‘신기리(新基里)’라 칭하고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1962년에 신기리 2구(新基里2區)와 분리되었다.
묘천1구 괘내마을
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에 의하면 마을의 지형이 ‘고양이(猫)혈’이라 하여 묘(猫)자를 쓰고 여기에 마을앞 내(川)가 있다하여 ‘묘천(猫川)’이라 하였으며 묘천(猫川)의 한자풀이 음(音)을 따 ‘괴내’라고도 불리우고 있다.
덕동, 물래뜸, 참새굴, 가새뜸, 안뜸 등 촌락으로 구성되었고 1914년에 행정구역(行政區域) 으로 당시의 도상면 신흥리 일부를 편입하여 오곡면(梧谷面)에 속해 있다가 1973년 곡성읍에 편입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묘천2구 댕밑마을
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에 의하면 마을의 지형이 고양이(猫)혈이라 하여 묘자(猫)를 쓰고 여기에 마을앞 내(川)가 있다하여 ‘묘천(猫川)’이라 하였다. 마을 위로 신을 모시는 ‘당(堂)집’이 있고 ‘마을이 당집 밑에 위치하고 있다’하여 ‘댕밑’ 또는 ‘당대리(堂代里)’라고 불렀다. 또한 이곳을 ‘용정(龍井)마을’이라 부르기도 한다. 1973년까지 오곡면(梧谷面)에 속해 있다가 행정구역(行政區域) 변경으로 곡성읍(谷城邑)에 편입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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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담당부서 곡성읍
  • 담당자 구경희
  • 연락처 061-360-7112
  • 최종수정일 2024-0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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