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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명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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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동면 지명유래

본 면은 사찰이 18개 있다하여 목사동면으로 칭하였다 함.
평리1구(坪湖마을) 평리2구(高頭마을) 평리3구(弓頭마을) 동암리(東岩마을) 구룡리(九龍마을) 사당리(司堂마을) 용암리(龍岩마을) 고죽리(古竹마을) 도장리(道藏마을) 범계1구(川坪마을) 범계2구(虎谷마을) 공북1구(龜龍마을) 공북2구(孝垈마을) 소방리(小防마을) 대신리(大新마을) 당산리(堂山마을) 덕산리(德山마을) 신기리(新基마을) 신전1구(高濟 마을) 신전2구(新田마을) 죽정1구(元停마을) 죽정2구(竹林마을) 죽정3구(猶峙마을) 용봉구(坪地마을) 용봉2구(龍田마을)
평리1구 평호(坪湖)마을
마을이 목사동면의 들(들, 멀…몰…말… 마을)은 작으나 들을 형성한 곳에 있는 마을이라는데서 유래하여 ‘들멀’이라고 하였다는 설과 마을이 목사동면의 첫머리에 자리잡고 있다하여 ‘들말’, 즉 들어서면 처음의 마을이라는데서 연유했다고하는 설이 전한다. 마을 형국이 행주형(行舟形)이라하여 ‘평호(平湖)’라 부르다가 1914년 평리1리(坪里1里)로 개칭하였다.
평리2구 고두(高頭)마을
1730년경, 들멀(平湖)마을이 홍수로 해마다 피해를 당하자 이를 면하기 위하여 들멀마을 윗쪽, 즉 마을 머리 뒤 높은 곳에다 마을을 조성했다 하여 ‘고머리(高頭里)’라 칭했다 전한다. 한편으로는 지형(地形)이 활(弓)의 시위에 심고를 매는 형으로 도고지로부터 양냥고지에 이르기까지 활머리 부분에 해당하는 ‘고(高)의 머리(頭)’형태에서 연유됐다고도 전한다. 1914년 행정구역통폐합 당시 평리2리(坪里2里)로 개칭하였다.
평리3구 궁두(弓頭)마을
마을 뒷 산이 활(弓)모양 같다 하여 ‘궁(弓)’자와 마을 앞산이 ‘화살머리(頭)’같다 하여 두 자를 합하여 ‘궁두리(弓頭里)’라 칭했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의해 평리3리(坪里3里)가 되었다.
동암리 동암(東岩)마을
마을이 상, 하촌으로 나뉘어 있다. 상촌(上村)은 불당골(佛堂골 : 또는 동산사곡[東山寺谷])라 칭하고, 하촌(下村)은 관암촌(觀岩村: 황새가 앉아 노는 바위가 있다 하여 학암촌[鶴岩村]이라고도 부른다)이라 칭하였으나 행정구역통폐합 당시 상촌(上村)의‘동(東)’자 하촌(下村)의‘암(岩)’자를 합하여 ‘동암(東岩)’이라 칭하게 되었다.
구룡리 구룡(九龍)마을
마을 뒷산 비래산(飛來山)에서 부터 마을 앞뜰까지 큰 바위 9개가 직선으로 나열되어 있고, 마을 뒷산 능선(稜線)이 용(龍)의 형국을 이루고 있는 봉우리가 모두 9개가 늘어서 있다 하여 구룡리(九龍里)라 부르게 되었다 전한다.
사당리 사당(司堂)마을
마을 터에 학동(學童)들을 가르치는 서당(書堂: 낙영재[樂英齋])이 있어 많은 문필가를 배출해 마을 이름을 ‘서당(書堂)골’이라 불러 오다가 1902년 마을명을 ‘사당(司堂)’으로 개칭하였다. 그 후 1914년 행정구역통폐합 당시 옆마을인 용암(龍岩)마을에서 ‘용(龍)’를 취하고, 사당(司堂)마을에서 ‘사(司)’를 합해 ‘용사(龍司)’라 칭하고 행정구역상 용사1리(龍司1里)로 개칭하였다.
용암리 용암(龍岩)마을
신숭겸(申崇謙)장군이 대황강(大荒江, 보성강)변의 ‘용(龍)바위’에서 무술을 연마하였다 하여 마을 이름을 ‘용암(龍岩)’이라 칭했다. 그 후 마을앞을 흐르는 시냇물을 건너는 다리를 놓아 ‘다리목’이라고도 불렀다. 그 후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당시 용암(龍岩)마을에서 ‘용(龍)’을 취하고, 사당(司堂)마을에서 ‘사(司)’를 합해 ‘용사(龍司)’라 명명했으며 행정구역상 용사2리(龍司2里)로 개칭하였다.
고죽리 고죽(古竹)마을
옛날부터 대밭이 무성하였는데 그 ‘대밭에 집을 지어 살면 부자가 난다’고 하였으나 부자는 나지 않고 과부만 자주 생겨 폐촌하고, 대밭 아래인 현 마을로 이주하게 되어 마을명을 ‘고죽(古竹)’이라 칭하다가 1914년 행정구역통폐합 당시 수곡리(水谷里)로 개칭하고 행정구역상 수곡1리(水谷1里)가 되었다.
도장리 도장(道藏)마을
선주산(仙住山)에서 도인(道人)이 바위 위에서 도(道)를 닦았다 하여 마을명을 ‘도장동(道藏洞)’이라 칭하게 되었다 전한다. 또한 ‘범을 잡기 위해 함정(陷井)을 많이 팠다’하여 ‘함정동(陷井洞)’이라고도 하다가 1914년 행정구역통폐합 당시 수곡2리(水谷2里)가 되었다.
범계1구 천평(川坪)마을
설촌 당시, 하천변에 있는 샘물이 피부병에 좋다고 하여 외지 사람들이 찾아와 약수를 많이 먹었다 전하며, 이처럼 마을 앞에 하천이 있고 들이 있다 하여 마을명을 ‘천평(川坪)’이라 칭하였다. 또한 옆마을인 호곡마을 보다 후에 설촌되었다 하여 ‘샛터’라고도 불러왔다. 그러나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당시 마을앞 대황강 나루터에 고기잡는 돛단배 범선(帆船)이 드나드는 곳이라 하여 ‘범계리(帆溪里)’라 개칭하고, 행정구역상 범계1리(帆溪1里)가 되었다.
범계2구 호곡(虎谷)마을
마을 뒷 산의 산세가 ‘호체형(虎體形)’이라 하여 마을 이름을 ‘범실(虎谷)’이라 칭하였다. 그러나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당시 마을앞 대황강 나루터에 고기잡는 돛단배 범선(帆船)이 드나드는 곳이라 하여 ‘범계리(帆溪里)’라 개칭하고, 행정구역상 범계2리(帆溪2里)가 되었다.
공북1구 구룡(龜龍)마을
마을 앞 연못에서 ‘거북이(龜)가 용(龍)이 되어 등천(登天)’하였다 하여 ‘구룡(龜龍)’이라 불러왔으며, 한편으로는 ‘마을이 거북처럼 생겼다’하여 속칭 ‘박의정지’ 또는 ‘배기정지(龜龍)’라 하다가 1914년 행정구역 변경으로 공북리(拱北里)로 명명, 행정구역상 공북1리(拱北1里)로 개칭하게 되었다.
공북2구 효대(孝垈)마을
의성김씨(義城金氏), 원주원씨(原州元氏) 두 성씨 가문에 효자(孝子)가 대(代)를 이어 나오므로 ‘효대(孝垈)’라 칭하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공북리(拱北里)’로 명명, 공북2리(拱北2里)가 되었다.
소방리 소방(小防)마을
전주최씨(全州崔氏) 최상하(崔尙夏)가 전주(全州)에서 살다가 마을터가 천석군(千石君)의 명당이라 입주하여 천석군(千石君) 부자가 되어 나갔다 하며, 그 후 유정필(柳貞弼)이 입향하여 천석군(千石君)이 된 최씨 집터에서 살면서 또 천석군(千石君)이 되었으며 옥천조씨(玉川趙氏)가 또 이 집터에 살면서 참봉(參奉)벼슬을 하는 등 대를 잇게 되자 그 후 여러 성씨들이 모여들어 살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전한다.
대신리 대신(大新)마을
현 대곡 3, 4리에서 거주하던 주민이 마을 터를 새로 잡아 설촌하였다 하여 ‘대신(大新)’또는 ‘새터’라 부르게 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당시 마을이 아미산 하단 큰 계곡에 자리잡고 있다 하여 대곡리(大谷里)로 명명하고 행정구역 명칭으로 ‘대곡2리(大谷2里)’라 칭하게 되었다.
당산리 당산(堂山)마을
마을 입구에 설촌 당시 심어놓은 느티나무들이 무성하다 하여 자연스럽게 ‘당산(堂山)나무 마을’또는 ‘당산(堂山)’이라 불러오다가 1914년 행정구역 변경으로 대곡3리(大谷3里)라 개칭하게 되었다.
덕산리 덕산(德山)마을
전주이씨(全州李氏) 이홍경(李弘慶)이 전북 남원(南原)에서 임진왜란(壬辰倭亂) 당시 남으로 피난, 당초 석곡면 유정리(柳亭里)에서 살다가 덕산(德山)마을 하동정씨(河東鄭氏)와 혼인의 인연으로 인해 이 마을 뒷산이 준수하여 400년은 후손들이 안주하겠다고 생각, 입향하게 되었다 전한다.
신기리 신기(新基)마을
마을이 대황강(보성강)변에 위치하고 있어 깊은 포구(浦口)처럼 생겼으므로 ‘심포(深浦)’라고 불러왔으나 홍수만 나면 강물이 마을로 범람해 오므로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당시 현 마을로 옮기면서 ‘신기리(新基里)’라 칭하게 되었다.
신전1구 고제(高濟)마을
마을 앞에 냇물이 있어 높은 터에 집을 지었다 하여 ‘고재굴’이라 하였다가 1914년 행정구역 변경에 따라 신전1리(薪田1里)라 칭하게 되었다.
신전2구 신전(薪田)마을
마을 뒤에 섶이 많아 ‘섶밭몰’이라 칭하다가 1914년 행정구역 변경으로 ‘섶밭’을 한자화 해 ‘신전(薪田)’으로 바꾸고 신전2리(薪田2里)로 개칭하게 되었다.
죽정1구 원정(元停)마을
백제시대(百濟時代)에 부유현(富有縣)의 읍(邑)이 옆마을 용봉리(龍鳳里)에 있을 때, 원님이 출입하면서 이곳에 정자(亭子)를 지어 휴식하는 곳이라 하여 ‘원정자(元亭子)’ 또는 ‘원정리(元亭里)’라 칭하게 되었다고 전해온다. 그 후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당시 현 2리인 죽림(竹林)의 ‘죽(竹)’자와 원정(元亭)의 ‘정(亭)’자를 합하여 ‘죽정(竹亭)’이라 칭했으며, 행정구역상 죽정1리(竹亭1里)가 되었다.
죽정2구 죽림(竹林)마을
마을위에 대밭을 만들어 대밭이 왕성하자 ‘죽림(竹林)마을’이라 부르다가 1914년 행정구역통폐합 당시 죽림(竹林)의 ‘죽(竹)’자와 원정(元亭)의 ‘정(亭)’자를 합하여 ‘죽정(竹亭)’이라 칭했으며, 행정구역상 죽정2리(竹亭2里)가 되었다.
죽정3구 유치(猶峙)마을
풍수지리설에 의하여 마을의 뒷산이 닭혈 즉, 양계쟁소혈(兩鷄爭巢穴)이라 하여 마을이름을 ‘닭재몰’이라 칭하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당시 원정(元亭), 월평(月坪), 죽림(竹林), 송전(松田) 등을 폐합하여 죽정리(竹亭里)로 명명하고 행정구역상 죽정3리(竹亭3里)가 되었다.
용봉1구 평지(坪地)마을
마을 뒤 계곡에 용소(龍沼)라는 곳에서 용(龍)이 승천할 때, 봉황(鳳凰)새가 호위를 하였다하여 용봉(龍鳳)이라 불렀다 한다. 덕흥성(德興城)을 폐하고 새로 터를 평평한 곳에 잡았다 하여 ‘평지(平地)’라고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당시 용봉1리(龍鳳1里)가 되었다.
용봉2구 용전(龍田)마을
마을 뒷산 계곡에서 용(龍)이 승천하였다 하여 ‘용전(龍田)’이라 칭하게 되었다. 1914년에 행정구역 변경으로 용봉2리(龍鳳2里)라 개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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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담당부서 목사동면
  • 담당자 김아영
  • 연락처 061-360-7513
  • 최종수정일 2024-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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