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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산사 박물관 태안사

작성일
2023.12.19 23:29
등록자
나종화
조회수
22
태안사
태안사
태안사
태안사
태안사

우리나라 역사는 몇 번의 중대한 격변기를 거칩니다.
그중에서 신라가 멸망하고 궁예와 견훤 그리고 왕건이 각축을 벌이는
후삼국 시대를 거쳐 고려가 세워지는 약 100년 동안의 과정은
우리나라 역사에서 가장 혼란스러운 시기였을 것입니다.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은 적어도 서너 번은 나라와 왕조가 바뀌는
경험을 했을 테니까요.

용광로처럼 끓어오르던 그 시대의 중심에 곡성 태안사가 있었다고
한다면 ‘에이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핀잔을 들을 것 같아요.

지금부터 그 이유를 간략하게 설명 드릴게요.
혜철 스님은 신라 사람으로 당나라로 건너가 선불교를 공부합니다.
그리고 두각을 나타냅니다. 육조 혜능의 법통을 이은
지장선사가 가장 아끼는 수제자가 됩니다. 로마 가톨릭에 비유 한다면
차기 교황이 될 수 있는 유력한 추기경 반열에 오른 거나 마찬가지인 셈이지요.
당시에는 선불교가 당나라에서 선풍을 일으키면서
어느덧 불교의 주류를 형성합니다.
그런데 이 대단한 인물이 돌연 귀국을 합니다.
당시 신라 문성왕은 혜철 스님의 귀국을 무척 반깁니다.
나라가 귀족끼리의 갈등과 민심이반으로
혼란의 소용돌이에 빠져들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도력이 깊은 혜철 스님이 오게 되면 이런 문제들이
저절로 수습될 것이라는 기대감이 있었어요.

그런데 혜철 스님은 서라벌로 가지 않고
곡성 태안사에 눌러앉아 버립니다.
그리고 시대개혁을 위한 선불교 운동 즉 구산선문을 펼칩니다.
왕과 백성을 가리지 않고 누구나 깨달으면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선불교 사상은 왕과 귀족이 공고한 권력을 쥐고 있는 신라에서는
무척 급진적이면서도 희망이 넘치는 사상이었죠.
그러자 승려들뿐만 아니라 영향력 있는 호족과 백성들까지
태안사로 몰려옵니다.
그중에는 유명한 도선국사도 있었습니다.
혜철 스님은 도선의 비범함을 알아보고 자신이 스승에게
배운 심법과 더불어, 대륙을 두루 돌아다니면서 배운
도교와 밀교에서 비롯된 땅을 바로잡아 세상을 바로 세우는
풍수지리 사상을 전수 합니다.
우리나라 땅을 두루 섭렵한 도선은 스승의 가르침을 토대로
특유의 비보풍수사상을 정립하고 도선 비결을 남겼다고
전해집니다.

왕건은 도선의 사상을 이념적 토대로하여 고려를 창업합니다.
아울러 태안사를 근거지로 삼은 구산선문 동리산파는
고려 창업에 직간접으로 관여하고 이후 고려 왕실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합니다.

이런 내용은 결코 뇌피셜이 아닌 사실입니다. 태안사에 가면
그 증거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태안사 전각 맨 위쪽에 자리 잡은 적인 선사 혜철의
승탑이 첫 번째 증거입니다.
현재는 보물로 지정돼 있고, 국보 승격을 추진 중입니다.

아래쪽 탑전에는 혜철 선사의 법통을 이어온 광자 대사 윤다의 승탑과
탑비가 각각 보물로 지정돼 있습니다.
고려 조정 차원에서 태안사를 향한 대우가 얼마나
극진했는지를 탑비와 승탑이 말해주고 있습니다.

절 입구를 수문장처럼 지키고 서 있는 일주문도
그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보물로 지정되었습니다.

그 밖에도 수장고에 보관 중인 대 바라와 동종도 각각 보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대 바라는 세종대왕의 둘째 형님 효령대군이
태안사에 머물렀을 때 시주한 유물이라고 합니다.
이 두 개의 보물은 실물은 볼 수 없고 만세루에 걸려 있는
사진으로만 볼 수 있습니다.

보물을 무려 6개나 보유한 태안사는 산사 박물관이라
불러도 전혀 부족함이 없습니다.

♣ 주차장 이용
탐방객은 연못 아래쪽에 조성된 주차장을 이용할 수 있습니다.

♣ 대중교통으로 오실 경우
곡성읍에서 태안사 입구 버스 정류장까지 1시간 간격으로
농어촌 버스를 운행합니다. 버스정류장에서 태안사까지는 약 2.5km로
워낙에 아름다운 길이라서 걸어서 들어가는 맛이 있습니다.

■ 태안사와 함께 가볼 만한 곳
- 조태일 시문학관
- 독도 사진전시관

  • 담당자 : 관광과 관광정책팀
  • 061-360-8412
  • 최종업데이트 2024.04.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