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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명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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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면 지명유래

월평마을, 매평마을, 매산마을, 흑석마을, 상대마을, 하대마을, 약내마을, 대곡마을, 운치마을, 상금마을, 내금마을, 외금마을, 택촌마을, 서봉마을, 탑동마을, 곡촌마을, 평촌마을, 군촌마을, 가마동마을, 창정마을, 노동마을, 하립마을, 상립마을, 궁동마을, 삼응마을, 연지마을, 송전마을, 기동마을, 내동마을, 종방마을 지명유래
매월1구 월평(月坪)마을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월평(月坪), 월곡(月谷), 월명동(月明洞)과 매산(梅山), 탑동(塔洞)의 각 일부를 병합, 월평(月坪)과 매산(梅山)마을에서 한자씩을 취해 ‘매월리(梅月里)’라 명명했으며, 행정구역상 매월1리(梅月1里)이다.
매월2구 매평(梅坪)마을
과거 옹기점(甕器店)이 있어 ‘점촌(店村)’으로 불리웠다. 그러나 이 지역이 ‘매화낙지(梅花落地)’의 명당터라 하여 ‘매(梅)’자와 입면평야(坪) 지대에 위치한다 하여 ‘평(坪)’자를 취해 ‘매평(梅坪)’이라 명명하였으며, 행정구역상 ‘매월2리(梅月2里)’로 현재에 이르고 있다.
매월3구 매산(梅山)마을
매화낙지(梅花落地)로서 매(梅)의 첫 자를 취하고 마을뒷쪽의 천자봉 산자락 아래에 자리잡고 있다 하여 산(山)자를 따‘매산(梅山)’으로 불리며, 행정구역상 매월3리(梅月3里)로 구분해 부른다.
흑석리 흑석(黑石)마을
본래 옥과군(玉果郡) 입평면(立平面)의 지역으로서 검은돌이 있으므로 ‘검은들’또는 ‘흑석(黑石)’, ‘금평(琴坪)’이라 하였다. 1908년 창평군(昌平郡) 입면(立面)이 되었다. 금평(琴坪)이 ‘검은들’로 변하고, ‘검은들’이 ‘검은돌’로 오인되어 ‘흑석(黑石)’으로 표기되었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당시 상흑리(上黑里), 하흑리(下黑里), 노림리(蘆林里)를 합하여 ‘흑석리(黑石里)’로 개칭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대장1구 상대(上大)마을
본래 옥과군 입평면(玉果郡立坪面)의 지역인데 1908년에 창평군(昌坪郡) 입면(立面)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行政區域) 폐합에 따라 대리(大里)와 장동(壯洞), 약천(藥川)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대리(大里)와 장동(壯洞)의 첫글자를 따서 ‘대장리(大壯里)’라 명명했다. 행정구역상 대장1리(大壯1里)로 부른다.
대장2구 하대(下大)마을
1914년 행정구역(行政區域) 폐합에 따라 대리(大里)와 장동(壯洞), 약천(藥川)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대리(大里)와 장동(壯洞)의 첫글자를 따서 ‘대장리(大壯里)’라 명명했다. 행정구역상 대장2리(大壯2里)로 부른다. 대장리(大壯里) 아래에 위치하므로 ‘하대(下大)’, 대리(大里)라 하여 ‘대판이’ 등으로 부르고 있다.
약천리 약천(藥川)마을
원래 양내(梁內) 또는 ‘돌(똘)안’이라 불리웠으나 마을명을 동악산(動樂山)이 마을의 주산(主山)이 되었으므로 동악산에서 나는 생수(生水)가 신선하다 하여 ‘약수(藥水)’ 또는 ‘약천(藥川)이라 고쳤다. 1908년에 창평군(昌平郡) 입면(立面)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行政區域) 폐합에 따라 장동(壯洞) 일부를 병합하여 ‘약천리(藥川里)’라 명명하고 곡성군(谷城郡) 입면(立面)에 편입, 현재에 이르고 있다.
만수1구 대곡(大谷)마을
물이 좋으므로 ‘만수동(萬水洞)’ 또는 ‘만수(萬水)’라 불렀으며, 여러 골짜기들이 부채살처럼 모여 하나의 큰 골짜기(大谷)를 이루고 있다 하여 ‘대골(大谷)’ 또는 ‘댓굴’이라고 불러왔다.(만민의 피난처여서 만수(萬水)라 했다는 설도 있다) 1908년에 창평군(昌平郡) 입면(立面)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行政區域) 폐합에 따라 운치(雲峙), 노림(蘆林), 매산(梅山), 상흑(上黑)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만수리(萬水里)’라 칭하고 곡성군 입면(立面)에 편입되었으며, 만수리(萬水里) 중 윗쪽에 위치하고 있어 ‘상만(上萬)’ 또는 ‘대굴’등으로 불리고 있다.
만수2구 운치(雲峙)마을
풍수지리(風水地理)설에 의한 지형이 ‘운중발룡(雲中發龍)’이라 하여 마을명을 ‘운치(雲峙)’라고 칭해왔다. 언제부터인가 ‘언재’, ‘운치(雲峙)’, ‘운재’등으로 혼용해 불리우다가 부르게 쉽게 ‘언재’로 불러오고 있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당시 만수동(萬水洞)과 합하여 ‘만수리(萬水里)’로 개칭(改稱)되어 현재에 이르게 되었으며, 행정구역상 만수2리(萬水2里)를 하만(下萬), 운치(雲峙), 언재 등으로 부르고 있다.
금산1구 상금(上琴)마을
1908년에 창평군 입면(昌平郡立面)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行政區域) 폐합에 따라 내금(內琴), 외금(外琴), 상금(上琴), 택촌(擇村)과 만수동(萬水洞), 운봉(雲峯), 탑동(塔洞), 마산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금산리(琴山里)’라 하여 입면(立面)에 편입되었다. 원래 금산(金山)으로 불리었으나 마을 뒷산이 거문고처럼 생겼으므로 동악산(動樂山)의 악(樂)과 맞추기 위해 ‘금산(琴山)’이라고 명명했다고 전한다. 또 하나 전하는 바에 따르면, 6대 면장인 정운학(鄭雲鶴)씨가 ‘금산(金山)’ 을 ‘금산(琴山)’으로 바꾸어 표기했다고도 전한다. 제일 위쪽에 위치하고 있어 ‘상금(上琴)’ 또는 ‘상짐산이’로 불리고 있다.
금산2구 내금(內琴)마을
금산리(琴山里)에서 안쪽에 위치하고 있어 ‘내금(內琴)’ 또는 ‘안짐산이’로 부른다. 행정구역상 금산2리(琴山2里)이다.
금산3구 외금(外琴)마을
금산리(琴山里)에서 마을 바깥쪽에 위치하고 있으므로 ‘외금(外琴)’ 또는 ‘외짐산이’로 불리고 있다. 행정구역상 금산3리(琴山3里)이다.
금산4구 택촌(擇村)마을
‘둔덕위의 안락한 장소를 가려서 마을을 형성했다’는 의미로 ‘택촌(擇村)’이라고 불리고 있다. 행정구역상 금산4리(琴山4里)이다. 한편으로는 논어 이인(里仁)편에 ‘위미(爲美)하니 택불처인(擇不處仁)이면 언득지(焉得知)이로라’는 의미로 택촌이라 명명했다는 설도 전한다.
서봉1구 서봉(捿鳳)마을
창평군 입면(昌平郡立面)의 지역으로서 서봉리(棲鳳里)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개편(行政區域改編)에 따라 탑동(塔洞), 가마(柯麻), 노동(蘆洞)의 각 일부와 전북 남원시 방산리 일부를 병합하여 ‘서봉리(棲鳳里)’라 하여 곡성군 입면(谷城郡立面)에 편입되었다. 1955년 1리는 서봉리, 2리는 탑동으로 구분(區分)되어 현재에 이른다.
서봉2구 탑동(塔洞)마을
서봉리(棲鳳里)로 1구와 같으며 1955년 1,2구로 분구(分區)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으나 절터에 남아있는 탑(塔)이 있어 마을명을 ‘탑동(塔洞)’이라고도 하며, 죽순을 먹고 큰다고 하여 ‘봉죽(鳳竹)’이라고도 불렀으나 현재는 1,2구를 함께 서봉(棲鳳)으로 많이 부르고 있다.
제월1구 곡촌(谷村)마을
본래 옥과군(玉果郡) 입평면(立坪面)의 지역인데 1908년에 창평군(昌平郡) 입면(立面)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行政區域) 폐합에 따라 ‘군촌(涒村)’, ‘곡촌(谷村)’, ‘하촌(下村)’, ‘탑동(塔洞)’의 각 마을과 전북 남원시 소견곡면의 신기리 일부를 병합, 마을 앞을 흐르는 섬진강이 달처럼 둘러싸고 흐르므로 ‘제월리(霽月里)’라 명명하고, 곡성군 입면(立面)에 편입되었으며, 행정구역 상 제월1리(霽月1里)가 되었다. ‘덤재(256m)골짜기의 끝에 위치하고 있다’하여 ‘골말’이라고도 불러왔다.
제월2구 평촌(坪村)마을
본래 옥과군(玉果郡) 입평면(立坪面)의 지역인데 1908년에 창평군(昌平郡) 입면(立面)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行政區域) 폐합에 따라 ‘군촌(涒村)’, ‘곡촌(谷村)’, ‘하촌(下村)’, ‘탑동(塔洞)’의 각 마을과 전북 남원시 소견곡면의 신기리 일부를 병합, 마을 앞을 흐르는 섬진강이 달처럼 둘러싸고 흐르므로 ‘제월리(霽月里)’라 명명하고, 곡성군 입면(立面)에 편입되었으며, 행정구역 상 제월2리(霽月2里)가 되었다. 예전에는 ‘하촌(下村)’으로 불러왔으며, 마을 앞들이 평평하여 ‘평촌(坪村)’이라 부르고 있다.
제월3구 군촌(涒村)마을
1520년대 심광정(沈光亭)이 이주해 들어 오면서 마을명을‘군지촌(涒池村)’이라 정하였다. 그 동안 ‘군지촌(涒池村)’ 또는 ‘군촌(涒村)으로 혼용해 불러왔으나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당시, ‘제월리(霽月里)’라 명명하고, 행정구역상 ‘제월3리(霽月3里)’가 되었다.
창정1구 부동(釜洞)마을
옥과군 입평면(玉果郡立平面)의 지역(地域)으로서 창정(昌亭)이라 하였는데 1908년 창평군 입면(昌平郡立面)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行政區域) 폐합에 따라 ‘가마(柯麻)’, ‘노동(蘆洞)’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창정리(昌亭里)’라 칭하고 곡성군 입면(谷城郡立面)에 편입되었다. 행정구역상 창정1리(昌亭1里)가 되었다. 통상 창정1리(昌亭1里)를 가마솥 모양으로 옴팍한 지형을 두고 ‘가마솥 부(釜)’자를 따서 ‘부동(釜洞)’ 또는 ‘가마동(柯麻洞)’으로 부르고 있다.
창정2구 창정(昌亭)마을
옥과군 입평면(玉果郡立平面)의 지역(地域)으로서 창정(昌亭)이라 하였는데 1908년 창평군 입면(昌平郡立面)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行政區域) 폐합에 따라 ‘가마(柯麻)’, ‘노동(蘆洞)’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창정리(昌亭里)’라 칭하고 곡성군 입면(谷城郡立面)에 편입되었다. 1955년 1월 분구(分區)되어 창정2리(昌亭2里)로 됐으나 통상 ‘창정(昌亭)’ 또는 ‘창자’라고 부르고 있다.
창정3구 노동(蘆洞)마을
마을뒷쪽으로 갈대가 많아 ‘노동(蘆洞)’이라 불렀으며, 속칭 ‘창자’라 불리었으나 ‘창정(昌亭)’으로 많이 부르고 있다. 1955년 1월 창정3리로 분구(分區)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입석1구 하입(下立)마을
옥과군 입평면(玉果郡立坪面)의 지역으로서 마을앞에 ‘선돌’이 있으므로 ‘선돌’ 또는 ‘입석(立石)’이라 하였다. 1908년 창평군 입면(昌平郡立面)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폐합(行政區域廢合)에 따라 ‘월산리(月山里)’를 병합하여 ‘입석리(立石里)’라 칭하고 곡성군 입면(谷城郡立面)에 편입되었다. 한편 입석1리(立石1里)를 입석(立石) 아래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하립(下立)’또는 ‘아래선돌’이라 불리어 오고 있다.
입석2구 상입(上立)마을
옥과군 입평면(玉果郡立坪面)의 지역으로서 선돌이 있으므로 ‘선돌’ 또는 ‘입석(立石)’이라 하였는데 입석2리(立石2里)가 입석1리의 위에 있는 마을이므로 1914년 행정구역 폐합(行政區域廢合)에 따라 ‘입석리(立石里)’라 칭하고 곡성군 입면(谷城郡立面)에 편입되었다. ‘상립(上立)’, ‘웃선돌’로 불리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삼오1구 궁동(弓洞)마을
원래의 마을명은 오리동(梧里洞)으로 ‘오리골’ 또는 ‘오록골’등으로 부르고 있다. 원래 옥과군 입평면(玉果郡立坪面)의 지역인데, 1908년 창평군 입면(昌平郡立面)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行政區域) 개편에 따라 오리동(梧里洞), 삼응(三應), 연지(蓮池)를 병합, ‘삼응(三應)’과 ‘오리(梧里)’에서 한 자씩 취해 ‘삼오리(三梧里)’라 명명하였으며, 곡성군 입면(谷城郡立面)에 편입된 후 삼오1리(三梧1里)가 되었다. 마을을 감싸고 있는 마을의 지형이 마치 활(弓)의 형태를 취하고 있어 조선조 말부터 ‘궁동(弓洞)’이라고 불러왔다.
삼오2구 삼응(三應)마을
원래 마을명은 ‘삼응리(三應里)’라 불러왔다. 원래 옥과군 입평면(玉果郡立坪面)의 지역인데, 1908년 창평군 입면(昌平郡立面)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行政區域) 개편에 따라 오리동(梧里洞), 삼응(三應), 연지(蓮池)를 병합하여 ‘삼응(三應)’과 ‘오리(梧里)’에서 한 자씩 취해 ‘삼오리(三梧里)’라 명명하였으며, 곡성군 입면(谷城郡立面)에 편입된 후 삼오2리(三梧2里)가 되었다.
삼오3구 연지(蓮地)마을
삼응리(三應里)의 서쪽에 있는 마을로 삼오2리(三梧2里)에 속해 있다가 1983년 분구(分區), 삼오3리(三梧3里)가 되었다. 인근에 일명 ‘쌍방죽(연방죽, 백련지)’이 있는데, 연꽃이 많이 피어 그 연꽃의 방죽을 본떠서 ‘연지리(蓮池里)’라 칭하였다. 통상 삼오3리(三梧3里)를 ‘연촌(蓮村)’, ‘연지촌(蓮池村)’으로 부르고 있다.
송전1구 송전(松田)마을
옛 옥과군(玉果郡) 수대곡면의 지역으로 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에 ‘송학하전형국(松鶴下田形局)’으로 ‘소나무 밭(숲)이였다’ 하여 ‘솔밭’ 또는 ‘송전(松田)’이라 불리어지고 있다. 1908년 창평군 입면(昌平郡立面)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폐합(行政區域廢合)에 따라 송전리(松田里), 기동(基洞), 내동(內洞), 합강리(合江里)의 각 일부와 입면 노동(立面蘆洞) 일부를 병합하여 옥과면 송전리(松田里)로 개칭했다. 1983년 2월 행정구역(行政區域) 개편으로 송전 1, 2, 3, 4리 4개마을 모두가 옥과면에서 입면(立面)으로 편입되었다. 통상, 송전1리(松田1里)를 ‘송전(松田)’으로 부르고 있다.
송전2구 기동(基洞)마을
‘샛터골’에 터를 잡았다 하여 ‘신기동(新基洞)’이라 부르다가 ‘기동(基洞)’으로 부른다. 1983년 2월 행정구역(行政區域) 개편으로 송전 1, 2, 3, 4리 4개마을 모두가 옥과면에서 입면(立面)으로 편입되었다. 기동(基洞)은 행정구역상 송전2리(松田2里)이다.
송전3구 내동(內洞)마을
송전리(松田里) 마을들 중에서 서북쪽 내부에 있는 안마을이라 하여 ‘안골’ 또는 ‘내동(內洞)’이라 칭하였다 전한다. 1908년 창평군 입면(昌平郡立面)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폐합(行政區域廢合)에 따라 송전리(松田里), 기동(基洞), 내동(內洞), 합강리(合江里)의 각 일부와 입면 노동(立面蘆洞) 일부를 병합하여 옥과면 송전리(松田里)로 개칭했다. 1983년 2월 행정구역(行政區域) 개편으로 송전 1, 2, 3, 4리 4개마을 모두가 옥과면에서 입면(立面)으로 편입되었다. 행정구역상 송전3리(松田3里)이다.
송전4구 종방(鍾舫)마을
일제강점기에 설립된 종연방직(鐘淵紡織)을 약칭으로 종방(鐘紡)이라 부르는데, 1932년 일제시대때 버려진 황무지를 종연방직(鐘淵紡織)에서 뽕나무밭(桑田) 24만평을 조성(造成)하고 잠실 5동과 주택 6동을 건립하였으므로 이를 동네이름으로 쓰다가 이를 종방(鍾舫)으로 바꾸어 마을명으로 그대로 쓰고 있다. 일제강점기 말 옥과면 송전리(玉果面松田里)로 되었다가 1983년 2월 행정구역 변경(行政區域變更)으로 입면 송전리(立面松田里)로 편입, 송전4리(松田4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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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담당부서 입면
  • 담당자 장원준
  • 연락처 061-360-7912
  • 최종수정일 2024-0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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